"오, 맙소사! 갈수록 태산이군요. 대체 당신 이름이 뭡니까?"
그는 자기 이름을 알지 못했으므로, 짐작으로 대답했습니다. 페르스발 드 갈루아라고. 그는 자기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지만, 알지 못한 채 사실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 그라알 이야기, 크레티앵 드 트루아, 최애리 옮김
중세 문학에서는 작품의 중반부까지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던 기사들이 누군가로부터 호명됨으로써 이름을 드러내고는 한다. 귀네비어 왕비로부터 호명되어 이름이 밝혀지는 영웅적인 기사 랜슬롯이나,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다가 대충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이름을 지어 말한 페르스발이 그러하다. 특히 페르스발은 이후에 정말로 '페르스발'이라고 불리게 됨으로써, '자기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지만 알지 못한 채 사실을 말한 것'이 된다.
인간에게 이름은 왜 중요할까? 한국인이니, 우리 조상들의 이름짓기 문화부터 살펴보려 한다.
과거 한반도의 이름짓기 문화는 성별과 신분에 따라 크게 갈렸다. 일단, 호적에 호적명이 오르는 시민은 양인 남성뿐이었다.
정식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관명이 곧 호적명이었다. 어릴 때의 이름인 아명과 별칭인 별명이 있고, 그 밖에도 자(字)·호(號)·별호(別號)·시호(諡號)·택호·법명(法名)·예명(藝名)·가명(假名)·당호(堂號) 등이 있었다. 이렇게 이름의 종류가 많고 다양한 것은 조상들이 이름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컸던가를 말해주는데, 전통사회에서 양인 남성은 누구나 관명과 아명을 가졌으며, 성인이 됨에 따라 자와 택호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반면 여자들은 보통 아명과 택호만을 가졌다. 택호는 시집 어른들이 부르기 좋게 붙여주는 이름으로, 아명과 마찬가지로 정식 이름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영우리'에서 시집 온 여자를 '영우댁'으로 부르곤 했다.
아명은 천한 이름일수록 역신의 시기를 받지 않아 오래 산다는 믿음에서 천박하게 지었다. 개똥이, 거묵이, 검둥이 따위였다. 아명은 곧 애칭이기 때문에 가족뿐 아니라 이웃에서도 부담 없이 부르곤 했다. 그러나 정식이름인 관명을 얻게 되면 아명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얻은 관명은 평생을 두고 소중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가 성인이 되면 관례를 치르고 새로운 이름인 자(字)를 얻었다.
우리가 잘 아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관명이 이황이며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였으므로, 이황의 벗들은 이황을 '황아!'가 아닌 '경호야!'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황이 살았을 당시 함께 지냈던 지인들이 막 부르곤 했던 이름은 정말로 사료에만 적혀 있어 후손이 기억하지 않고, 귀히 여겨 역사에 남도록 아꼈던 이름은 정말로 후손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또한 자는 이름의 대용물로서 가까운 친구간이나 이웃에서 허물없이 부르는 것으로, 대개는 이름을 깊고 빛나게 하기 위해서 화려하게 지었다고 한다.
양인 남성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니는 동시에 노비와 여자들에게는 아명 이외에 정식 이름인 관명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제식민지 시기를 지나면서는 민적정리를 하는 공무원이 즉석에서 이름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상들이 이름을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는 이름이 인간의 실존을 완성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달성한다 해도 이름이 역사에 남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더 나아가서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 된다.
예를 들면 한반도에서만 수많은 노비와 여성들이 역사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국모인 조선의 왕비들조차 우리는 'OO왕후 O씨'로 기억한다. '장희빈'이라는 호명은 그의 위치가 희빈이었고 그의 아버지의 성씨가 장씨였다는 것만을 증명할 뿐이다. 이름을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어딘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음을 예시한다. 일각에서는 '왜 위인들은 남자밖에 없냐'라며 편리하게 이러한 역사를 묵인하곤 하지만, 이름도 없었던 이들이 업적을 남길 기회를 얻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며, 업적을 세웠다 하더라도 적힐 이름이 없었을 테다.
인류 역사에서 바퀴의 발명은 어쩌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 바퀴를 발명한 사람은 우리에게 실존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나마 우리가 아는 것은 수메르인이 바퀴를 발명했을 확률이 높았다는 것 정도다. '수메르'라는 이름조차 없다면 우리는 바퀴의 발명자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바퀴를 발명한 인류'와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 사이에는 바퀴와 전구 사이만큼이나, 또는 인류와 한 남자 사이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다.
정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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