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부터 말하자면, 유치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스펙트럼을 제시하는 영화여서 좋았다. 가족적인 요소가 한국적 클리셰라는 평이 많던데, 적어도 나에게는 한국의 가족애 클리셰와는 다른 결로 다가왔다. 내가 한국 영화를 봐오면서 느낀 한국의 가족애 클리셰는 혈연관계 중심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속 가부장제화된 가족애나, 황정민/송강호/마동석 등 유명 남배우들을 핵심으로 둔 가족애적 동료애였다. 승리호의 가족애는 이러한 기존 한국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묘사된다.
인간 중에서 가장 어린 것으로 짐작되는 장 선장은 떡진 머리로도 스타일이 죽지 않는 성질 더러운 대장이다. 또한 감독은 누가 봐도 태호보다 타이거 박의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타이거 박이 아닌 태호에게 아버지의 정체성을 줬다.
대표적인 가족애 헐리우드 영화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로켓과 그루트 캐릭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다양성을 내세우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장치로 '이종족'을 선택했다. 식물이나 동물의 모습을 한 이종족은 인간이 한 사회에서 향유하곤 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연스럽게 벗어나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거부감 없이 보여줄 수 있다. <승리호>에서 업동이가 하는 역할도 이와 같다. 업동이는 허스키한 남성의 목소리를 지닌 전투로봇이지만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아 젊은 여성의 외견을 갖춘다. 업동이가 로봇이라는 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 김향기에게서 유해진의 목소리가 나오는 장면이 성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반 관객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다가와 다양성을 어필할 수 있었다.
어린 여성의 안드로제닉한 리더십과 돈만 밝히는 남성의 부성애, 마약상 같은 비주얼을 지닌 남성 캐릭터의 식물을 가꾸는 취미, 아이에게 '언니'라는 말을 듣고 좋아하는 로봇의 낮은 목소리까지. <승리호>의 주인공들은 그저 자기 자신 그대로 등장함으로써 다양성을 보여준다. 때로는 업동이처럼 자신의 모습에 불만을 갖고 변화를 꾀하기도 한다. 교훈적이지도 교조적이지도 않다. 단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업동이가 새로운 목소리를 구매하려 하자 지금의 목소리가 좋다며 만류하는 꽃님이에게 그래도 '이 목소리로 계속 살 수는 없다'며 목소리를 골라 달라고 하는 업동이의 대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는 보통의 우리를 보여주는 듯하기도 하다.
감히 말하건대 한국의 콘텐츠들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달라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테제를 외치기 위해 교훈적인 서사 또는 선언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김조광수의 영화들에서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주인공을 괴롭히다가 영화의 클라이맥스 이후 갑자기 세상이 장밋빛 인권지킴이로 변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다양성을 말하는 콘텐츠들은 인종적 다양성조차 경험하지 못하는 환경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말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이런 본연의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반면 <모던 패밀리>, <그레이스 앤 프랭키> 등 미국에서 성황리에 방영된 드라마들을 보면, 게이 사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나, 자신보다 어린 새엄마를 미워하는 딸, 관절염 때문에 바이브레이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노인 여성 등의 등장인물들이 너무 불행하지도 너무 행복하지도 않은 보통의 세계관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보통의 관계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다양성을 담보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승리호>에서 한국의 메이저 콘텐츠 최초로 미드 <모던 패밀리>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편안한 다양성을 엿본 느낌이었다. 다시 말해 <승리호>는 가장 간접적이지만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성고정관념, 나이주의를 유쾌하게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보여줬다. 세미 아포칼립스 배경의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적 특성이 이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유치한 가족서사에 대해 한 마디 더 얹으며 <승리호>를 옹호하고 싶은데,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세계관이 장대할 뿐, 뻔한 가족서사에다 심지어 미국적 클리셰 '남주인공의 대디 이슈'까지 끼얹어놓은 영화다. 그럼에도 흔히 <가오갤>에서보다 <승리호>에서 더 격한 오글거림(?)을 느끼는 것은, —물론 분명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잘 아는 한국 배우들의 얼굴과 모국어 때문에 더 가깝게 다가오는 거리감 차이라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색감이라 나에겐 미장센도 괜찮았고 CG에도 돈을 많이 쓴 태가 나서 좋았다. 범우주 세계관이랍시고 영어만 써대는 헐리우드 스페이스 오페라와 달리 외국어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엑스트라들이 연기를 너무 못하더라. 특히 뉴스 보고 놀라는 장면에서 좀 많이 깼다. 그래도 유쾌한 오락 영화로는 손색이 없었다. 내 평점은 10점 만점에 8.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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