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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자기 앞의 생 〉 리뷰: 자기 앞의 사람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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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야 할까?

흔히 ‘사랑’은 성애적 사랑인 ‘에로스’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애착을 가진 물건에도, 매일 마주치는 풍경에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에게도 우리는 사랑을 준다. 하지만 빠른 템포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잦고 이른 이별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때로 두려우면서 대개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다. 사랑을 준 대상을 곧 상실하거나, 사랑이 나에게 도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다룰 때에는, 사랑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렇게, 회의감이 든다. 사랑해야 할까.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우리에게 ‘사랑하기’의 태도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던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출판했던 이 소설은 유태인, 아랍인, 창녀, 고아, 성소수자, 노인과 같은 사회 속 약자들을 재조명하는 따스한 시선과 섬세한 필치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20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 「자기 앞의 생」은 ‘과연 사랑이 필요한가’라는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사랑해야 한다”라는 원작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그 대답으로 온 힘을 다해 들이민다. 다만 영화가 표현하는 사랑은 소설에서의 사랑과는 사뭇 다르다. 


소설 『자기 앞의 생』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열네 살 아랍인 소년 모모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인 로자 아줌마의 집에 얹혀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뇌질환과 노환으로 떠나보내는 이별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소설의 큰 줄기와 캐릭터의 원형만 따와서 나머지는 재해석한 전혀 다른 작품이다. 폰티 감독은 원작을 각색하면서 여러 변주를 주었다.

우선 등장인물의 비중을 크게 조정했다. 원작에서는 모모 주변 어른들이 비교적 고루 등장하지만 영화는 모모와 로자의 관계에 집중했다. 포스터 역시 로자를 연기한 소피아 로렌의 얼굴을 크게 담았다. 중요한 조연인 롤라 아줌마와 하밀 할아버지도 함께 등장하나, 이들은 보다 보조적인 역할로 그려진다. 주요인물의 성격도 다른데, 모모는 소설에서보다 거침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로자도 소설에서와 달리 유태인 수용소에서의 경험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인적사항도 다르다. 영화는 열네 살 아랍인 소년이었던 모모를 그보다 두 살 어린 열두 살에 세네갈 출신의 흑인으로 그렸다. 폴란드 출신 유태인으로서 전형적인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정체성을 가졌던 로자도 이탈리아 출신의 유태인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주는 등장인물들의 성격 변화를 좀더 자연스러워 보이게 한다.

모모는 주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혼자 사랑에 대해 배워나가는 인물이다. 이에 더해, 영화에서 훨씬 시니컬해진 모모는 성숙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른들에게도 가르쳐 준다. 모모는 오래전 아내와 사별한 하밀 할아버지를 로자 아줌마와 이어주기 위해 외롭지 않느냐며 운을 뗀다. 그러고는 책과 양탄자가 있다고 대답하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대꾸한다. “그런 것들과 포옹은 못하잖아요?”

모모가 로자와 자신을 이어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밀은 말한다. 자신은 회교도라 유태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이에 대한 모모의 대답은 명쾌하다. “로자 아줌마는 더 이상 유태인이 아니에요, 그냥 늙었을 뿐이죠(Madame Rosa non è più un'ebrea, è solo vecchia).”

 

원작 소설 또는 간략한 영화 소개라도 읽은 후에 영화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로자의 과거 이야기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음에 놀랄지도 모른다. 로자는 자신이 어릴 적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숨곤 했던 막사 바닥 밑과 비슷한 지하실에 내려가 종종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사실은 로자의 팔뚝에 새겨진 수인번호 문신에서 잠깐 암시되었다가, 딱 한 번, 지하실에 따라 내려온 모모에게 자신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부분에서 잠깐 공개될 뿐이다. 그마저도 모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우슈비츠’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우스위치’요?”하고 되묻는 모모에게 로자는 모모와는 상관 없는 이름이니 몰라도 된다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소설과의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소설의 로자는 툭하면 집단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들려주고, 집에 똥 냄새가 진동하면 아우슈비츠 같다며 소리를 지르며, 늙고 병든 자신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음을 모모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를 듣는 모모 역시 아우슈비츠가 무엇이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이 로자가 유태인이라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반면 영화 속 모모에게 로자는 가끔 지하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갈 곳 없는 매춘부의 아이들을 거둬 키우고, 어린 시절 비아레조 근방에 살았을 때 보았다는 샛노란 미모사 풍경을 그리워하고, 이제는 아파서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노인일 따름이다. 모모에게 로자는 어떤 과거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저 ‘모모 앞의 사람’일 뿐.

또다른 등장인물 롤라를 조명하는 방식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롤라는 여성호르몬 치료를 받고 있는 트랜스젠더로, 소설에서는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만 매춘부에다 성소수자라 그 바람을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모모는 “정말로 로자 아줌마만큼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 세네갈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며 롤라를 변호한다. 소설은 롤라가 얼마나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롤라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설득하려 한다. 호흡이 긴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영화는 롤라가 엄마로서 얼마나 적합한 인물인가를 설명하는 대신 롤라에게 소설 속 롤라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 ‘바부’를 선물했다. 그리고 햇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들어오는 창문 앞에서 로자와 행복하게 춤을 추고, 아버지에게 아이를 보여주러 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롤라의 모습을 그리며 롤라의 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는 모모의 시선을 대변하므로, 가감 없이 담백하기만 한 롤라에 대한 묘사는 롤라 역시도 ‘모모 앞의 사람’일 따름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로자와 춤을 추는 롤라.

 

모모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주체일뿐만 아니라 대상의 바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주체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기억으로 병원을 거부하는 로자는 자신의 상태가 악화되자  모모에게 자신을 절대로 병원에 데려가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모모가 집에 없는 사이 로자는 병원에 실려가 버린다. 모모는 로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로자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에서 몰래 데리고 나와 밤새 휠체어를 밀어 집 지하실로 데려온다. 그러고는 각종 집기를 집에서 가지고 내려와 지하실을 꾸며두고 로자와 시간을 보낸다.

로자를 휠체어에 태워 집으로 향하는 모모. 해가 밝아오고 있다.

지하실에서, 모모는 로자에게 샛노란 미모사 꽃다발을 선물한다. 생화를 구할 수 없어서 조화를 구했다며 아쉬워하는 모모에게 로자는 이보다 더 멋진 선물은 없을 것이라며 미소짓는다. 로자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가 깨어난 모모는 로자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다.

미모사를 선물받은 로자.

모모와 로자의 대탈출과 이별을 보며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고개를 들지도 모른다. 그대로 병원에 있었더라면 더 오래, 더 편안하게 살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로자도 자신을 아꼈던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모모는 툭, 무심한 투로 이렇게 대꾸할 것 같다. ‘로자 아줌마가 병원이 싫다고 했으니까요.’

 

이쯤에서, 영화를 관통하는 소설의 한 부분을 소개하려 한다. 소설 초중반부에서 모모는 로자가 머리카락도 없고 몸무게는 구십오 킬로그램이나 되는 데다 너무 못생겨서 아무도 로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로자의 정신이 시시때때로 나가 버려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되었을 때쯤, 모모는 이웃의 죽음을 목격해 겁에 질린 로자의 손을 잡아주며 문득 자신이 로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과 살다 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자 아줌마는 그렇게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유태인 특유의 짙은 갈색 눈을 하고 있었다.

못생기고 늙었고 아름다운 갈색 눈을 가진 로자 아줌마. 모모는 자신이 로자를 사랑하는 것이 ‘로자가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둘러대지만, 곧바로 사실 로자가 그렇게 못생긴 것은 아니라며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 에밀 아자르는 이 모순적인 서술을 통해 모모가 로자를 사랑하는 데에는 뾰족한 이유가 없음을, 사실 로자가 못생겼든 아니든 모모에게는 중요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자는 로자이기 때문에, 모모의 앞에 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영화 속 모모의 ‘사랑하기’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자기 앞의 것을 그대로 사랑하는 것. 모모에게 사랑은 현재이다. 그는 과거의 로자나 미래의 로자에게 관심이 없다. 단지 과거의 로자가 있게 한 자기 앞의 로자를, 미래의 로자를 있게 할 자기 앞의 로자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이 단순명료함이 모모가 구사하는 사랑의 원천이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하기’의 원형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모모의 이 물음은 아마도 원작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것이다. 모모는 어릴 적 들었던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상기하며 자답한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같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물음에 다르게 대답하는 것 같다. 사랑할 사람이 없어도 살 수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원작에서 모모는 로자가 죽자 로자의 썩어가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시취를 덮기 위해 향수를 뿌린다. 평안하게 잠든 로자의 모습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했던 소년의 바람은 영화에서 시들지도 썩지도 않는 조화 미모사를 통해 실현된다. 샛노란 조화 미모사는 모모가 로자에게 주었던 사랑을 상징한다. 그 마음은 샛노란 조화 미모사처럼 생생하며 영속적이어서, 대상이 이 세상에서 소멸할지라도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주었던 사랑은 나를 이루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도, 대상이 내 곁을 떠날지라도, 내가 주었던 사랑은 조화처럼 싱싱하며, 여전히 나의 것이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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