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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영국 맨체스터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2인 1조 게임을 하는 자리에서 영국을 이루는 4개 국가를 전부 적어내는 문제를 푼 적이 있었다.
나는 스페인에서 온 친구와 같은 팀이었는데, 우리는 그만 웨일스와 북아일랜드를 헷갈려 ‘북웨일스(Northern Wales)’와 ‘아일랜드(Ireland)’라고 써내고 말았다. 영국으로부터 수십 년도 아니고 수백 년간 침략당하고 착취당했던 아일랜드의 역사를 고려했을 때 이 답안은 '일본의 섬들을 적으라'는 문제에 '독도'를 쓴 것보다 더 몰상식한 답안이다. 서양인들이 한국과 일본을 헷갈려할 때면 일본은 한국을 지배했던 국가이니 절대 헷갈려서는 안 된다고 성을 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기억이다.
그러나 유일한 동아시아인인 나와 몇 명의 인도인, 한 명의 미국인을 제외하면 모두가 유럽 국가 출신이었던 그 모임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맞힌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아일랜드의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제목은 19세기의 아일랜드 문인 로버트 드와이어 조이스가 쓴 동명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아일랜드를 수탈하는 영국에게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화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이 시에 멜로디를 붙여 민요로 부르곤 했다. 영국군에게 맞아 죽은 미하일의 장례식에서 미하일의 할머니인 페기가 부른 노래도 바로 이 민요다. 페기가 사랑하는 손자를 위로하며 이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서, 금빛 보리밭으로 표상되는 농업과 목축업의 나라 아일랜드를 흔드는 산골짜기의 미풍은 아일랜드를 침략한 외세인 잉글랜드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시의 전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담담한데 그래서 더 가슴 아픈 시다.)
아일랜드는 수백 년 동안 영국에게 침략당하고 이에 저항했던 눈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톨릭교도로서는 잉글랜드에 의해 이주해온 개신교도들로부터 착취당했고, 소작농과 공장 노동자 등의 노동자 계급으로서는 영국의 지주와 자본가들로부터 착취당했다. 이 피지배의 역사 속에서 영국-아일랜드 조약 이후 원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상적 차이로 인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기도 했다.
감옥에서 만난 데미언과 기차 기관사 댄은 ‘영국군을 몰아낸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영국은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아일랜드를 계속 지배할 것’이라는 아일랜드 노동당 수장 제임스 코널리의 연설을 암송한다. 이 장면은 당시 아일랜드의 많은 독립투사들이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위시한 영국에 맞서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립하고자 했던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지주계급에 의한 노동자 착취는 다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노동자’라는 아일랜드의 계급적 정체성은 프롤레타리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생산한 농작물은 잉글랜드의 식민정책으로 인해 자국민을 먹여 살리는 대신 잉글랜드로 유출되기 일쑤였고, 아일랜드는 이러한 잉글랜드 지주들의 횡포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와 19세기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기근에 수백만 명이 죽거나 나라를 떠나는 커다란 타격을 입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런던의 자본가’로 거듭 묘사된다.
아일랜드의 피지배적 정체성 중에는 종교도 있었다. 영화에서 시네드는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대해, “무장하고 제복을 입은 영국군으로 바뀌었을 뿐 이전의 신교 깡패(gang)들이 괴롭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라고 말한다. 아일랜드인들에게 개신교란 깡패와 같았던 것이다.
17세기 잉글랜드의 정치가 크롬웰이 아일랜드를 진압하기 위해 대거 이주시킨 영국계 지주들의 개신교적 정체성은 소작농이나 농장 노동자였던 가톨릭 토착민들과 대비되었다. 개신교-가톨릭 구도가 곧 자본가-노동자 구도였으며 곧 침략자-아일랜드 구도였다. 그러니 아일랜드에서 개신교는 단순한 '이단'이나 '다른 종교'가 아닌 조국을 약탈한 침략자들이었으며 주민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이었다.
아일랜드 민족의 이와 같은 계급적·종교적 정체성은, 농·축산물을 영국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느라 목초지와 농장으로 남아야 했던 아일랜드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영국계 개신교도들이 주요 주민층을 이루는 얼스터 지방에선 산업이 발달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1921년에 독립해 1949년에는 브리튼 연합왕국에서 완전히 탈퇴해 아일랜드 공화국이 된 나라다. 1971년 아일랜드의 개신교 신자 대비 가톨릭 신자의 비율을 보여주는 맨 왼쪽 지도를 보면 (파란색일수록 가톨릭 신자가 많은 것) 대부분의 지방에서 주민의 80% 이상이 가톨릭이지만, 상대적으로 붉은 지역이 눈에 띈다. 이 붉은 지방을 포함한 북쪽 지방이 바로 얼스터로, 아일랜드 섬을 이루는 '얼스터, 문스터, 라인스터, 코나하트'의 네 지방 중 최북단에 있는 지방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지도를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얼스터 지방이 현재의 북아일랜드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그러나, 사실상 종교로 국경이 그어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종교 지도와 아일랜드-북아일랜드 지도는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1861년의 종교 지도를 봐도 알겠지만 1971년이나 1861년이나 종교 지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자치국으로 독립할 당시에도 저 종교지형은 유효했다는 뜻이다. 뚜렷하게 보이는 개신교 지역은 현재 북아일랜드로 그대로 남아있다. 아일랜드인들에게 가톨릭과 개신교의 의미가 어떠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 1861년과 1991년 종교 지도를 다룬 문서를 보고 싶다면 다음을 방문하자. https://www.wesleyjohnston.com/users/ireland/past/protestants_1861_1991.html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반대하는 데미언과 동지들은 자본주의 권력이 지배하는 영국의 자치령 처지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조약을 받아들여 아일랜드 국회가 영국의 꼭두각시가 되면 노동자들은 더욱 가난해지며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지배하기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걸하며 그 노동가치를 스스로 낮추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독립투쟁세력 내부의 사상적 갈등이 영화에서 최초로 부각되는 지점은 바로 아일랜드 공화국 법정의 첫 재판 장면이다. 원금의 5배를 이자로 청구한 죄로 법정에 선 자본가에 대해 테디는 그가 IRA에 무기를 대주는 사람이므로 죄를 사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댄은 “겉엔 녹색을 칠해도 속은 영국 놈들과 똑같이 가자는 이야기냐”며 직접적으로 테디를 비꼬고, “IRA가 지주들은 지지하면서 우리와 같이 땅과 가축을 되찾으려는 가난뱅이들은 짓밟았다”며, 자본을 가지고 시장경제의 상위계급을 차지한 자본가가 아니라 원금의 5배를 냈어야 하는 노파를 조명한다. 테디는 이에 자신의 돈으로 노파에게 식료품을 사겠다고 하지만 별로 설득력은 없다. 그런 방법으로는 이 판례에 영향을 받을 제2의 노파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든 자본가의 돈은 노파로 대변되는 수많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착취해 얻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디는 현실과 타협하려 한다.
반면 ‘이름을 영어로 말하지 않아 개죽음을 당한 것이 순국이냐’며 비꼬았던 현실주의자 데미언은 자신이 본 가난한 자들의 현실을 기반으로 이상을 추구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친밀하게 알고 지냈던 크리스를 밀고자 처단 원칙에 따라 처형하게 된 데미언은 댄에게 “이 아일랜드가 우리가 이렇게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길 바란다(I hope this Ireland we're fighting for is worth it.)”라고 말한다. 네이버 영화의 명대사란에는 이 대사가 '조국이란 게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지?'라고 쓰여 있지만 너-무 심한 의역이다. 뉘앙스도, 어투도 아예 다른데 왜 저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이게 정식 번역으로 굳어졌는지, 네이버 시리즈 온에서도 자막은 후자로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 원래 대사는 형제의 갈등에서 동생 데미언의 사상적 배경을 한 번에 설명하기에, 의역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데미언의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에 대한 소망은, 자치권을 획득했어도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국민 4명 중 한 명이 실업자이며 여전히 영국 자본주의 권력가들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일랜드의 모습에 타협하지 않는 투쟁가로의 변화와 곧장 이어진다.
이렇게까지 해서 얻은 조국이, 과연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 것일까.
데미언은 또한 의사로서 여러 환자를 진료하면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어린아이들을 목격한다. 교회를 박차고 나온 데미언을 따라 나온 테디가 급진주의 전단에 대해 질책하자 데미언은 자신이 본 굶주리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언급하며 “사람들이 예전처럼 뉴욕과 런던으로 떠나길 바라느냐(Do you expect them to head off to New York and London like before?)”고 되묻는다. 참고로 이 부분도 공식 자막의 의역이 심했는데,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조국을 떠나길 바래?'라고 되어 있다. 아일랜드인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그동안 영국으로 인해 수탈당하면서 대기근을 버티지 못하고 뉴욕과 런던으로 이주해야 했던 역사를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맥락을 소거하고 '예전처럼'이라는 말을 빼버리니,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굶주림은 보통 죽음을 상징하며 아일랜드에서도 아사한 국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데미언이 테디에게 “사람들이 또 굶어 죽기를 바라?”가 아닌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길 바라?”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가치 있는’ 조국에 대한 데미언의 염원을 시사한다. 먹고살기 위해 수많은 인구가 해외로 이주했던 대기근을 두 번이나 경험했던 아일랜드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IRA에 합류하기 전에는 일류 병원에서 근무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고자 했던 노동자로서 바라본 빈곤은 그저 많은 사람의 죽음이나 국가의 쇠락이 아닌, ‘노동자가 떠나고 싶어 하는 나라’, 즉 ‘조국으로서의 의미가 없는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친우를 죽이면서까지 얻은 조국이었기에, 이 조국은 의미가 있어야 했다. 사람들이 떠나는 곳이 아니어야 했다.가치가 있는 곳. 데미언이 얻어낸 조국은 그런 곳이어야 했다.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된 이후, 자본가-개신교-침략자와 노동자-가톨릭-아일랜드 구도는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조약 찬성파와 의견을 같이하는 가톨릭 교회는 조약에 반대하며 투쟁하는 비정규군을 파면하기로 한다. 이에 데미언은 가톨릭 교회가 부자의 편에 선다며 언성을 높인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모든 수난과 시험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던 가톨릭 교회가 이제는 노동자를 위해 분투하는 IRA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조약 반대파의 예측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실제로 아일랜드는 조약을 받아들여 1922년 자유국이 된 이후에도 한동안 영국이 형성한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를 유지했으며, 이전과 같이 농업과 축산업에 집중하면서 영국으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했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는 빈곤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이렇듯 아일랜드 국회와 가톨릭의 행보는 ‘영국적’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형이 동생을 총살하기에 이르기까지, 오도노반 형제의 갈등으로 표상되는 아일랜드 내전 발발 과정은 계급적·종교적 맥락 속에서 감독에 의해 심판대 위에 오른다. 그들이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죽은 이들은 그 나라를 누렸는가. 심지어 투쟁가들은 조약 이후에도 예전의 동지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숨겨 주고 밥까지 지어 주었던 이웃 주민들을 포로처럼 세워놓고 위협해야 했다. 영국의 수탈과 착취에 맞서 아일랜드인을 결속시켰던 계급적·종교적 정체성은 결국 민족을 분열시키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크리스의 어머니가 데미언에게 했던 말인 “너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구나”라는 한 서린 대사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시네드가 테디에게 하는 말로 재등장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상처 입히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역시 사랑하는 동족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정작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아일랜드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에 영화가 끝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름다운 녹색의 나라 아일랜드의 보리밭이 황금빛으로 여문 후 찾아온 부드러운 산골짜기의 바람은 과연 영국뿐이었을까? 영국군에게 맞아 죽은 손자를 추모하는 할머니의 입에서 불리는 이 민요를 들려주면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영국임을 명백하게 보여준 듯했던 영화는, 곧 아일랜드를 휩쓸고 지나갈 내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특유의 담백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마침표 없이 막을 내린다.
1. 단행본과 논문
2. 인터넷 뉴스 기사 및 웹사이트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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