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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 랭스턴 휴스,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흑인 시인, 흑인 지식인으로서 미국인이자 아프리카계 흑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융합하고자 애썼던 인물이다.
W.E.B 뒤보아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자신의 '이중정체성(twoness)'으로 인해 두 개의 영혼, 두 개의 생각, 화해하지 못한 두 개의 분투를 겪게 된다. 시인들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흑인들의 시가 구체적인 인종적 경험을 다루어야 하는지 또는 다루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1920년대 초 첨예화되기도 했다. 이때 대부분의 흑인 시인들은 당시 커져가고 있던 흑인 지성인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종적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자아를 표현할지에 대한 선택은 시인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다. W.S. 브레이스웨이트나 카운티 컬런 같은 시인들은 자신이 흑인 시인으로 정체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시인 그 자체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반면 랭스턴 휴스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그의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리고자 했다. 그는 비밥 리듬을 차용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는데, 그러한 방식들 중에는 '대자연'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도 있었다.
휴스의 초기 시들은 아프리카 역사의 상징물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의 특정 장소명이나 아프리카 역사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을 다룬다. 그리고 이 상징들은 자연이라는 강력한 주제에 의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상 기념비적인 시 <흑인이 강에 대해 말하다(The Negro Speaks of Rivers)>는 열여덟의 휴스가 클리블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여름에 쓴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강을 주제로 자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의 자아를 찾는다.
나는 강들을 알아왔다:
나는 세상만큼이나 태고의, 인류의 혈관에 흐르는 피의 흐름보다 오래된, 그런 강들을 알아왔다.
내 영혼은 강들처럼 깊게 자라왔다.
나는 새벽이 여물지 않았을 때 유프라테스 강에서 멱을 감았다.
나는 콩고 강가에 오두막을 지었다. 그러자 강은 내게 자장가를 들려주었다.
나는 나일강을 올려다보며 그 위에 피라미드를 세웠으며,
나는 에이브 링컨이 뉴올리언즈에 내려왔을 때 미시시피강의 노래를 들었고 노을에 황금빛으로 물든 진흙 한복판을 보았다.
나는 강들을 알아왔다:
태곳적의, 어스름한 강들을.
내 영혼은 강들처럼 깊게 자라왔다.
I’ve known rivers:
I’ve known rivers ancient as the world and older than the flow of human blood in human veins.
My soul has grown deep like the rivers.
I bathed in the Euphrates when dawns were young.
I built my hut near the Congo and it lulled me to sleep.
I looked upon the Nile and raised the pyramids above it.
I heard the singing of the Mississippi when Abe Lincoln went down to New Orleans, and I’ve seen its muddy bosom turn all golden in the sunset.
I’ve known rivers:
Ancient, dusky rivers.
My soul has grown deep like the rivers.
이 작품의 주요 테마는 강, 특히 고대의 거대한 강이다. 이 시에서 휴스는 미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강인 미시시피강을 비롯해 아프리카의 강인 콩고강과 나일강 등 구체적인 강의 이름을 언급한다. 노예제를 철폐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이름과, 가난한 링컨이 미시시피 강을 따라 보트로 물건을 실어날랐던 뉴올리언스의 지명도 등장한다.
이 시에서 강이라는 메타포는 강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특성에 의해 성공적으로 휴스의 이중자아를 융합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첫째, 고대의 강은 과거에 존재했으나 현재에도 역시 존재하고 있다. 강을 알아 '온' 화자 휴스는 강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강은 현재의 화자 역시도 다다를 수 있는 공간이다.
즉 그는 현재 살아 있고 말하고 있는 한 개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는 강이라는 시공간의 동시성과 지속성은 [현재 말하고 있는 화자]와 [화자가 상상하는 역사적 사건]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융합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강은 수많은 문명의 요람이자 인류의 젖줄로서 인류사 그 자체를 상징할 수 있다.
생태비평담론의 권위자인 로렌스 뷰엘은 "비인간 자연은 단지 프레이밍 장치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가 자연사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존재로서 기능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분석은 <흑인이 강에 대해 말하다>에서도 유효하다. 비인간 자연인 강은 그저 자연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멱을 감고, 오두막을 짓고, 강의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었으며, 피라미드를 세웠던 과거의 인간들 즉 인류사를 암시하고 있다.
화자 휴스는 강의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을 통해 미국적인 것과 아프리카적인 것이 어지럽게 혼재하는 자신의 영혼을 합일시키려 했다. "인간 혈관에 피가 흐르기도 전"에 존재했던 강들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적인 것과 아프리카적인 것은 의미를 잃는다.
현재의 휴스는 이중자아로 혼란스러워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지만 아주 오래된 태곳적의 강이 지나쳐온 시공간 속에서 그는 단지 하나의 인간, 하나의 생명체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대자연의 원시적인 분위기는 "진흙 한복판"이나 "노을"과 같은 시어를 통해 더 고조된다.
또한 "나의 영혼은 강들처럼 깊게 자라왔다"는 문장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공통적 시원인 대자연을 포착하는데, 휴스는 이 구를 시 끝에 재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의 유리된 이중자아를 "깊은 강"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성공적으로 이어붙여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합일된 개념으로 시를 완성한다.
<흑인이 강에 대해 말하다>에서 사용된 이 전략은 1922년 씌어진 시 <흑인(Negro)>에서 더 구조화되고 정렬된 형태로 드러난다.
나는 흑인이다:
밤이 까맣듯 까맣고,
내 아프리카의 깊이만큼 어두운.
나는 노예였다:
카이사르는 문간을 깨끗이 닦으라고 내게 명령했고
내가 워싱턴의 부츠들을 닦았다.
나는 노동자였다:
내 손 아래서 피라미드가 세워졌고
내가 울워스 빌딩의 모르타르를 만들었다.
나는 가수였다:
아프리카에서 조지아로 오는 길
슬픔의 노래를 들고 들어왔다
내가 래그타임을 만들었다.
나는 피해자였다:
벨기에인들은 콩고에서 내 두 손을 잘랐고
그들은 미시시피에서도 나를 폭행했다.
나는 흑인이다:
밤이 까맣듯 까맣고,
내 아프리카의 깊이만큼 까만.
I am a Negro:
Black as the night is black,
Black like the depths of my Africa.
I’ve been a slave:
Caesar told me to keep his door-steps clean.
I brushed the boots of Washington.
I’ve been a worker:
Under my hand the pyramids arose.
I made mortar for the Woolworth Building.
I’ve been a singer:
All the way from Africa to Georgia
I carried my sorrow songs.
I made ragtime.
I’ve been a victim:
The Belgians cut off my hands in the Congo.
They lynch me still in Mississippi.
I am a Negro:
Black as the night is black,
Black like the depths of my Africa.
"흑인(Negro)"인 화자 "나"는 각 연에서 흑인을 역사적 맥락에 따라 정체화한다. 이 시에서 휴스는 명확히 정해진 규칙을 따른다. 흑인을 정의내리는 구로 연을 시작하고, 아프리카 흑인들의 역사적 경험을 서술한 뒤, 미국 흑인들의 역사적 경험을 뒤이어 서술하면서 연을 마무리짓는다. 즉 휴스는 "노예", "노동자", "가수", "피해자"라는 단어를 통해, '노예로 거래되었던 아프리카의 흑인'과 '아메리카로 이송되어 살아온 미국의 흑인'을 평행선상에 놓는다.
시의 첫 연과 마지막 연 "나는 흑인이다"에서 단어 "흑인"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 장소들(인공물들)을 하나의 인종으로 묶으며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융합한다. 이때 휴스는 <흑인이 강에 대해 말하다>에서 그가 했던 것처럼 자연 상징물을 등장시켜 그의 아프리카적 특성과 미국적 특성의 원시적인 공통점을 찾아낸다.
<흑인이 강에 대해 말하다>에서 "강"이 '그의 영혼의 깊이'를 상징했다면, <흑인>에서는 "밤"이 '그의 아프리카의 깊이'와 '흑인의 피부색'을 상징한다. 강이나 밤은 존재할 뿐인 자연물이기에 어떤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해 밤은 멸시당하는 '까만' 색 그 자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물로서 '옳거나 그르지 않은, 존재 그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까만 피부가 응당 그렇게 여겨져야 하듯 말이다.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휴스의 애정은 "나의 아프리카(my Africa)"나 "흑인(Negro)"라는 시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어들은 1923년 8월에 씌어진 <나의 동포들>이라는 시의 "나의 동포들(my people)"라는 시어로 곧장 이어지게 된다.
The night is beautiful, / 밤은 아름답다,
So the faces of my people. / 내 동포들의 얼굴이 그러하듯이.
The stars are beautiful, / 별들은 아름답다,
So the eyes of my people. / 내 동포들의 눈이 그러하듯이.
Beautiful, also, is the sun. / 아름답다, 태양 역시도.
Beautiful, also, are the souls of my people. / 아름답다, 내 동포들의 영혼 역시도.
휴스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내 동포들의 영혼"을 아름다운 태양에 비유한다. 밤처럼 까만 동포들의 얼굴은 밤처럼 아름답고, 별처럼 빛나는 동포들의 눈동자는 별처럼 아름답다. 강이나 밤을 통해 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이중자아 융합하기'다. 그러나 이 시는 이전의 자연시들과 무언가 다르다.
잘 읽어보면 <나의 동포들>에는 미시시피 강, 뉴올리언스, 래그타임, 조지아, 피라미드와 같은 역사적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휴스는 오로지 대자연의 메타포만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휴스의 가치관은 1923년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22세가 된 휴스는 1923년 6월에 웨스트 헤슬타인이라는 이름의 화물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에서 그는 세네갈, 시에라리온, 콩고와 같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경유하게 된다.
크루족을 만난 휴스는 그들과 친구가 되려 했지만, 현지 아프리카인들은 휴스를 아프리카인 내지는 흑인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휴스의 피부색이 비교적 밝은 갈색이었고 머리카락 역시 곱슬기가 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휴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럽계 미국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으로, 혼혈이었다. 크루족은 휴스에게 말한다. "당신은 백인이오."
그전까지의 휴스는 아프리카인이면서 미국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고민했었지만, 아프리카 여행 이후에는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전혀 새로운 정체성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휴스는 이전 시들에서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경험들을 서술했었음에도 사실 그 어느 것도 휴스가 경험했거나 직접 전해들은 것이 아니었다. 휴스는 미국에서 태어난 데다 노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은 도저히 한국어로 번역할 수가 없었다.)
이 좌절은 그의 후기 시인 <아프리카와 미국의 파편(Afro-American Fragment)>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휴스는 이 시에서 자신의 뿌리인 아프리카에서조차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의 파편화된 자아를 그려내고 있다.
너무나 오래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은 아프리카.
기억조차 살아있지 않구나
역사책이 지어낸 것들을 제외한다면,
그 노래들을 제외한다면.
핏속으로 저며들고-
슬픈 노랫말로 다시 피를 빠져나오는
낯선 비흑인의 입에서 불리는 그 노래들을 제외한다면.
너무나 오래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은 아프리카.
무력으로 정복당했고 시절은 잃어버렸네
그 북소리들 말이지- 그리고
산산이 흩어진 인종 따라
이 노래가 불리우네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네
이 인간 본래의 땅의 노래를,
쓰라린 동경은 잃어버렸고
정처 없이 떠도는 이 노래를.
너무나 오래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그것은 아프리카의
검은 얼굴
So long,
So far away
Is Africa.
Not even memories alive
Save those that history books create,
Save those that songs
Beat back into the blood–
Beat out of blood with words sad-sung
In strange un-Negro tongue–
So long,
So far away
Is Africa.
Subdued and time-lost
Are the drums–and yet
Through some vast mist of race
There comes this song
I do not understand,
This song of atavistic land,
Of bitter yearnings lost
Without a place–
So long,
So far away
Is Africa's
Dark face.
화자는 아프리카가 "너무나 오래되었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심지어 "기억조자 살아있지 않은" 곳이라고 표현한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태곳적의 땅, 즉 "인간 본래의 땅(atavistic land)"이지만 화자와 너무나 유리된 나머지, 그의 초기 시에서 표현되었던 것과 같은 과거-현재의 동시성이나 시공간을 초월한 자연적 특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검은 얼굴(표면)은 더 이상 밤처럼 아름답거나 동포들처럼 아름답지 않다. 그저 오래되었고 멀리 떨어져있을 뿐이다.
그의 변화한 기법을 보여주는 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1926년 출판된 전설적인 시집 Weary Blues에 실린 <변해버린 꿈(Dream Variations)>이다.
To fling my arms wide / 내 두 팔을 크게 벌린다,
In some place of the sun, / 태양의 어떤 장소들에서 말이지.
To whirl and to dance / 빙그르르 돌고 춤을 춘다네,
Till the white day is done. / 이 백색의 날이 질 때까지.
Then rest at cool evening / 그리고 나서는 멋진 저녁에 쉰다네,
Beneath a tall tree / 키 큰 나무 아래서,
While night comes on gently, / 밤이 다정하게 찾아올 때 말이지.
Dark like me— / 나처럼 어두운 밤
That is my dream! / 그것은 나의 꿈이라네!
To fling my arms wide / 내 두 팔을 크게 벌린다
Dance! Whirl! Whirl! / 춤 춰! 빙그르르! 빙그르르!
Till the quick day is done. / 이 빠른 날이 질 때까지
Rest at pale evening . . . / 창백한 저녁에 휴식을 취한다네...
A tall, slim tree . . . / 호리호리한 나무...
Night coming tenderly / 다정하게 찾아오는 밤
Black like me. / 나처럼 까만 밤
이 시 역시 익숙한 메타포 "밤"을 사용하고, 다른 시들에서도 했던 것처럼 밤의 색을 화자의 까만 피부색에 빗대고 있다. 태양 아래서 빙그르르 돌면서 춤을 추고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인류 태초의 원시적인 모습을 암시하는데, 맥락상 태곳적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던 아프리카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곳이 아프리카라는 확실한 언급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즉 <변해버린 꿈>은 블랙 디아스포라를 합일시키려는 휴스의 열망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휴스는 그의 초기시에서 했던 것처럼 아프리카나 미국의 무언가를 비교한다거나, 아프리카의 대과거와 과거를 비교하는 등의 방식은 쓰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단순히 인류사 최초의 순간으로 이동하여 이것을 꿈이라고 부르기를 택했다. 이러한 서사적 전환은 아프리카의 아프리카인이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좌절을 맞고 아프리카 대륙의 기억에서 유리당한 휴스의 개인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아프리카를 표현하면서 대자연을 빗대는 것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가장 흔한 형태의 흑인 인종차별이기도 하다. 그러나, (휴스가 스스로 흑인인 것은 차치하고라도) 휴스의 시에서 사용된 대자연 메타포는 단순히 아프리카를 상징하지 않는다. 휴스는 자연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대신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흑인 디아스포라와 분리된 자의식을 결합하기 위해 특정한 역사적 사건, 인물, 장소들을 배경으로 한 자연을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인류에게 있어서 대자연의 시원적 의미, 그 어떤 인간의 구분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대자연의 본질을 부활시킨다.
물론, 그는 이중자아나 블랙 디아스포라 이외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시들도 수없이 많이 썼다.
그러나 그의 전설적인 작품 대부분은 이 이중자아와 블랙 디아스포라의 괴로움을 담고 있다. 데이비드 퍼킨스는 "사실 모든 흑인 시인들은 인종적 존재로서 인종적 감정이나 정체성을 말할 때 최고의 시를 썼다"라고 말한 바 있다. 휴스의 가장 저명하고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들이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자신만의 창조적인 관점을 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록 그의 후기시들이 <흑인이 강에 대해 말하다>나 <흑인>에서 사용된 전략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랭스턴 휴즈의 자연에 대한 이 이야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꿈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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