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에세이 『에로스의 종말』에서, 순수한 외부,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으로의 사랑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파국적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할 환대는 사랑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지만, 그의 논지는 환대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될 듯하다. 고대 서구 사회에서 이방인은 순수한 외부에서 온 완전한 타자이다. 손님의 신분을 증명해 줄 여권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도 없던 시절, 이방인을 맞이한다는 것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유지하고 있던 평화로운 균형을 깨뜨리는 재난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여행자로서의 입장이 더욱 혹독하다는 점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은 바다는 언제든 나그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오뒷세이아』에서도 등장했던 ‘추수할 수 없는 바다’라는 표현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바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공포와 경외심을 보여준다. 친절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세니아(ξενία)는 나그네를 친절하게 예우하고 대접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나그네와 걸인은 최고신인 제우스가 보낸 자들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걸인으로 변신한 신들을 예우해주었다가 상을 받은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그네의 수호신 헤르메스와 함께 방문한 제우스를 환대했다가 평생 신관으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이룬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키스는 환대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전승이다. 또한 노파로 변신한 헤라를 업고 강을 건넌 이아손은 여정 내내 헤라의 총애를 받는다.
또한 호메로스 시기 그리스는 폴리스라는 정치단위를 바탕으로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서 활발하게 교류했다. 암흑기에서 상고기로 진입하는 기원전 8세기에는 인구 팽창으로 인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주한 시민들이 세운 식민시 폴리스들이 세워지면서 폴리스의 숫자가 천여 개에 달했다. 이들은 서로 우호적으로 교류했으며 식민시도 모시에 대한 소속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 그리스인들에게 여행자에 대한 환대는 그리스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사회적 가치였다. 또한 인간은 타자와의 교류를 통해 자아와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사회적 존재다. 다시 말해 이방인을 맞이함으로써 깨어지는 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재난은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를 꾀하는 힘이 될 수 있다. 한병철은 파국적 침입이 일으키는 재난이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행복이면서 결국 구원의 길이라고 설명한다.
『오뒷세이아』에서도 나그네와 걸인은 최고신 제우스가 보내는 존재로서, 제우스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가족과 나라와 재산을 향해 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니만큼 『오뒷세이아』에서 환대의 가치는 주요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뒷세이아』에서는 “이윽고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라는 구절이 총 11번 등장한다. “달콤한 곡식에 대한 식욕을 해소했을 때”라는 구절도 한 번 등장한다. (맥락은 다르지만 『일리아스』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찾아온 사절단을 환대하는 아킬레우스를 묘사하는 “그리하여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음식을 배불리 먹은 후에야 손님의 신원을 묻거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러한 장면들은 나그네로서의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강성한 세력 또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부터 환대를 받았을 때 주로 등장한다.
텔레마코스는 멘테스의 모습을 한 아테나를 환영하며 “우선 식사부터 하고 그대의 용건을 말하”(제1권 124행)라고 청한다. 또 제4권에서는 메넬라오스가 텔레마코스와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60 “맛있게 드시오. 그대들이 저녁을 들고 나면
61 우리는 그대들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것이오.
62 그대들 부모님들의 혈통은 그대들에게서 소멸되지 않았군요.
63 그대들은 제우스께서 양육하신 홀을 가진 왕들인 그런 분들의 혈통임이
64 분명하니 말이오. 천한 자가 그대들 같은 자식은 낳지 못하는 법이오.”
두 손님이 고귀한 혈통임을 알아챘다는 메넬라오스는 그 궁금증을 억누르기까지 하면서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기를 미룬다. 아버지 오디세우스 역시 숱한 타지를 방문하며 칼립소, 파이아케스족, 에우마이오스 등로부터 환대를 경험하고, 이 환대로부터 도움을 받아 무사히 귀향한다. 김연신 서강대 독일문화학 교수는 논문 「유럽 손님문화의 기원 연구 - [오뒷세이아]와 고대 그리스의 손님문화」에서 “지략과 용기, 이 영웅에 대한 신들의 관심과 개입을 빼면 아무 보호 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방랑의 지속인가 아니면 귀향인가를 결정하는 궁극적 요인은 오뒷세우스와 전우들이 타지에서 받는 접대의 태도”라고 말했다. 특히나 동료를 잃은 후에 혈혈단신이 된 나그네 오디세우스에게 환대는 귀향을 위한 필수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환대의 가치를 무시하고 이방인을 적대시한 인물들은 특히 나그네의 여정을 그린 『오뒷세이아』에서 철저히 응징당한다. 손님들을 환대하지는 못할 망정 잡아먹어 버린 키클롭스가 대표적인 예시다. 오디세우스는 불에 달궈진 몽둥이에 눈을 찔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폴리페모스에게 “그대는 제집에서 손님 잡아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래서 제우스와 다른 신들께서 그대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오!”라고 외친다(제9권 478행). 즉 자신을 적대한 것에 대한 응징이라는 것이다. 또한 나그네의 모습을 한 오디세우스를 멸시한 구혼자들은 오디세우스로부터 무참히 살해당한다. 『아르고 호 이야기』의 아뮈코스도 자신의 땅에 당도한 이방인들을 권투 시합으로 살해해오다가 결국 폴리데우케스에게 두개골이 깨지며 처참한 모습으로 죽게 된다. 왕의 죽음에 분노하여 미뉘아이들에게 덤벼든 베브리케스인들 역시 미뉘아이들에게 무참히 도륙당한다.
다만 환대가 이렇게 납작한 긍정적 가치였느냐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일단 환대는 언제나 자신과 가족의 신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여정에 지친 이방인은 절대적인 약자이면서도 주인에게 언제든지 악의를 품고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환대의 가치를 깨어버리거나, 침략자와 우호적 손님이라는 이원적인 선택지에서 침략자를 택하는 인물들을 보자. 트로이 전쟁의 원흉인 파리스는 스파르타에 외교 차 방문했다가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환대를 받지만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는 배은망덕한 인물이다. 또한 『오뒷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와 휘하의 장병들이 방문한 마을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오디세우스 일행은 이스마로스라는 도시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죽이며, 제10권 41행에서는 “우리는 도시에서 그들의 아내들과 많은 재산을 갖고 와 나눠 가졌”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오디세우스가 기나긴 여정 동안 최초로 홀로 남게 된 시점도 침략자로서의 이방인 개념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저승에 간 오디세우스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서 들은 헬리오스의 섬에 있는 소를 절대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예언을 무시한 부하들은 헬리오스가 아끼는 소들을 몇 마리 잡아먹은 탓에 노여움을 사고, 배는 폭풍에 휘말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있는 곳으로 밀려난다. 그 과정에서 부하들은 모두 죽고 오디세우스만이 살아남는다. 또한 미뉘아이들은 콜키스에서 황금 양털을 내어주지 않으면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취하며, 결국 이를 훔쳐 달아나고 왕자까지 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침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는 얼마나 비도덕적인 약탈을 했는지가 아닌, 피해를 본 자가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파리스는 헬레네 부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서겠다고 맹세한 아카이오이족 전사들을 건드린 셈이었고, 결국 자신의 나라와 가족에 파멸을 불러왔다.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은 대가로 장병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먹지 않은 오디세우스만이 생존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 일행이 약탈한 도시는 힘이 없었으므로 작품에서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뿐더러 그저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될 뿐이다. 콜키스의 황금 양털을 훔쳐 달아나는 미뉘아이들은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귀환한다.
환대를 했다가 오히려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은 예도 살펴보자. 『아이네이스』에서는 트로이를 멸망으로 이끈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가 아이네이아스에 의해 자세히 언급된다. 탈주병으로 위장한 아카이오이족 지략가 시논은 자신이 희생제물로 선택되어 그리스 진영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말한다. 트로이야인들은 시논을 불쌍히 여겨 환대하고 트로이 목마와 함께 받아들였다가 그 선택으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이아케스족은 오디세우스를 환대하고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포세이돈으로부터 배가 돌이 되는 저주를 받는다. 또한 아이네이아스를 환대한 디도는 신들의 계략에 의해 정염에 휩싸인 채 명예도 잃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네 작품에서 묘사되는 긍정적인 환대들은 언뜻 크세니아 그 자체의 미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례들을 보면 진정한 환대, 가치 있는 환대의 본질은 결국 힘인 것을 알 수 있다. 순수한 외부에서 온 완전한 타자인 이방인이 침략자일 가능성을 차치해두고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수 있다는 것은 환대가 가져올 다양한 가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수십수백의 장정들은 작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부녀자를 강간할 수 있으나 스파르타와 같이 잘 닦인 강성한 국가에서는 공격을 시도해도 곧바로 제압당할 것이다. 건장한 청년들을 데리고 방문한 텔레마코스의 신원을 묻지도 않고 일단 성대한 만찬을 대접하는 메넬라오스는 힘을 가진 늠름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지나가다 들른 마을을 침략하여 살육을 벌인 것보다 신이 예뻐하는 소 몇 마리를 잡아먹은 것이 더 큰 재앙이었던 것 역시, 신이라는 절대자가 지닌 힘에 굴종하는 힘의 논리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오뒷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적대를 비판할 때 도덕적인 당위가 아닌 신을 그 판단근거로 삼는데, 시종일관 ‘제우스가 미워하는 행동’이라고 표현한다. 환대는 도덕적인 가치라기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거한 일종의 권력의 상징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잠시 현대인의 관점에서 빠져나와 시대상을 살펴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영웅 남성들은 전부 귀족으로서, 자신이 거느린 식솔들과 땅, 그 땅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수호하는 전사 엘리트였다. 이들은 외부로부터는 가족을 지키고, 비옥한 농토나 노예를 얻기 위해 다른 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실현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입체적인 환대 사례들을 읽게 되면 환대라는 행위가 아니라 환대를 할 수 있는 힘, 환대하지 않는 주인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이 당대에 진정으로 칭송받는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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