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울프』는 전설적인 예이츠 영웅 베오울프가 그렌델, 그렌델의 어미, 그리고 불 뿜는 용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국들을 지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다른 로망에도 자주 등장하는 초월적인 인물인 녹색 기사는 『가윈 경과 녹색 기사』에서 가윈의 모험을 촉발시키고 마무리짓는 역할을 한다. 두 작품에서 주인공과 맞닥뜨린 이 경이적인 초월적 존재들은 영웅을 영웅답게 하고 영웅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작품의 핵심 중추이다. 그러나 두 작품의 경이적 존재들은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이 작업을 수행해나간다.
흐로드가르는 현명한 성군이지만 백성들을 12년 동안이나 괴롭혀 온 “지옥에서 풀려나온 악귀” 그렌델을 처리하지 못하고 골머리를 앓는다. 이 악귀 그렌델을 처리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베오울프다. 베오울프는 악귀들을 물리치고, 이후 왕이 되어 나라를 잘 통치한 뒤 맞은 노년에는 예이츠 백성들을 학살하는 불 뿜는 용을 영웅적으로 무찌른 후 여기서 얻은 상처로 사망한다. 고로 베오울프의 영웅성은 괴물들의 존재를 통해 완성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그렌델의 외양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덩치가 크다는 그렌델의 몸집은 대체 얼마나 큰지, 눈은 몇 개이고 입은 몇 개인지, 어떻게 걸어다니며 피부색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 독자는(청자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오뒷세이아』 등의 고대 시에서 괴물의 모습이 등장과 동시에 자세하게 묘사되었던 것과는 다른 점이다. 독자는 베오울프가 흐로드가르를 돕기 위해 찾아간 후에야 그렌델이 베오울프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는 대목에서 그렌델이 손을 가진 괴물임을 알 수 있고 팔이 잘렸다는 대목에서 손이 팔에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뿐이다. 그렌델의 어미 역시, 암컷의 형태이고 그렌델보다 작다는 언급이 나올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불을 뿜는 용 역시 ‘사람들을 괴롭히는 노략자’, ‘언덕의 감시자’ 등의 호칭으로만 정체화되고 ‘얼룩무늬 몸통’을 가진 것으로만 묘사될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도통 추측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함구는 괴물들의 모습을 독자 나름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독자는 괴물들을 악마화하는 작품 속 숱한 언급들을 접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악랄하고 무시무시하며 역겨운 모습으로 괴물들을 상상해내게 된다. 또한 베오울프의 명검 내글링이 부러질 때 독자는 그가 상대한 괴물이 명검을 부러뜨릴 만큼 강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렇기에 베오울프가 화살이나 창도 아닌 맨손 또는 칼로 이들과 맞서 싸우고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장면에서 독자는 베오울프의 힘과 명성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재정의한다. 그렌델과 그 어미, 불을 뿜는 용이 지닌 경이로움은 따라서 독자에게 적극적으로 맡겨지며, 이로써 비로소 베오울프의 영웅성과 그의 영웅서사시인 『베오울프』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반면 『가윈 경과 녹색 기사』에서 녹색 기사의 외양은 매우 자세히 묘사된다. 아서 왕과 기사들 앞에 등장한 녹색 기사는 두툼한 가슴과 육중하고 균형 잡힌 허리, 긴 팔다리를 지닌 몸집 큰 거인이며 몸은 녹색으로 빛나고 눈은 번갯불 같은 섬광으로 번뜩인다. 뒤이어 작가는 녹색 기사의 허리에 달라붙는 튜닉, 안쪽과 가장자리에 모피를 댄 망토, 긴 양말 바지, 비단 띠, 전투용 구두를 비롯해 그가 지닌 휘황찬란한 보석과 그의 머리털과 수염의 생김새, 그가 타고 온 말과 그가 가지고 온 도끼의 모습까지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경이로운 녹색 기사의 외양은 아서 왕의 기사들마저도 놀라게 한다. 그곳에 있던 이들은 기이한 일들이라면 수없이 경험한 자들이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환상이나 요술, 마법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기사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차분한 판단으로 홀의 주인인 존경하는 아서 왕에게 발언권을 넘겨준다. 아서 왕은 이에 응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녹색 기사의 엄포에 응해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치욕스러운 말에 견디지 못한 왕이 녹색 기사의 요구에 응해 도끼를 휘두르려 하자 주인공 가윈이 나서서 기사도를 갖춘 공손한 언술로 녹색 기사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일련의 서술에서 작가는 녹색 기사의 경이로운 외양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가윈과 아서 왕, 아서 왕의 기사들이 지닌 용맹함을 효과적으로 증명한다. 특히나 가윈에 의해 목을 베였음에도 태연자약하게 그 머리를 주워 가지고 말을 타고 사라지는 녹색 기사의 모습은 가윈이 마주할 역경에 대해 기대감마저 심어 준다. 가윈이 발견해 찾아가는 녹색 기사의 성도 최상의 자태를 드러내는 석공 장식, 훌륭한 누문, 채색된 수많은 첨탑, 한껏 솟아오른 궁중 홀을 가진 경이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작중에서 가윈이 겪는 일들이 그의 무용을 뽐내는 용감무쌍한 모험이라기보다 그의 기사도를 증명하는 도덕적 여정이라는 점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녹색 기사와 녹색 기사의 성이 갖는 경이로운 외양은 가윈이 어떤 대단한 시험에 들었는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과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베오울프』와 『가윈 경과 녹색 기사』는 서로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경이를 묘사하고 작품의 중심축으로 활용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주된 이유는 베오울프의 영웅됨과 가윈의 영웅됨이 다르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전승된 전설을 재구성한 작품이지만, 『베오울프』는 고대의 게르만 전설을 ‘엮은’ 작품이며, 『가윈 경과 녹색 기사』는 중세 기사도를 갖춘 모범적인 기사를 ‘그려낸’ 작품이다. 초월적인 힘을 뽐내는 베오울프는 그에 걸맞게 신화적인 무력을 가져야만 했으며, 작가와 비슷한 시기를 사는 것처럼 그려지는 중세의 기사 가윈은 그에 걸맞게 기사도를 갖춰야만 했던 것이다.
2021년 서*대학교 '동서**세미나' 기말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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