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사 문학에서는 모험과 역경을 겪으며 성장하는 기사가 등장하곤 한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그라알 이야기』의 페르스발과 『죄수 마차를 탄 기사』의 랜슬롯이다. 특히 두 기사는 작품 속에서 이름 없이 여정을 시작하여 여러 가지 호칭으로 호명되다가 작품의 중간부터 이름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처음에는 ‘소년’으로 호명되던 페르스발은 이후 아서 왕에게 향하는 여정에서 ‘젊은이’라 호명되고, 대인에게서 기사 수여식을 받은 후로는 ‘신출내기 기사’를 거쳐 ‘기사’로 그 호칭이 바뀐다. 이후 그는 자신을 맞아준 아가씨로부터 ‘귀한 분’ 내지는 ‘아름다운 기사님’이라 불린다. 그런 다음 그는 길에서 만난 한 아가씨로부터 들은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페르스발 드 갈루아’라고 대답함으로써 마침내 이름을 가진 하나의 기사로 변모하며, 고뱅과 통성명을 하는 과정을 거쳐 궁정에서 아서 왕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늠름한 기사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페르스발의 성장담은 그 과정 면에서도 완벽하게 기사도에 대한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페르스발은 방패가 무엇인지, 기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촌놈이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숨은 힘을 지닌 인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그는 어머니의 말을 잘못 이해한 나머지 한 아가씨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고 반지를 빼앗는, 기사도의 극단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페르스발은 뛰어난 무력으로 붉은 기사를 처치하지만 무구를 벗기는 법을 몰라 이보네에게서 무구를 입고 벗는 법을 배우며, 삼베 옷보다 비단 옷이 좋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기사답게 숙녀와 바보의 복수를 다짐하며 길을 떠난다. 그는 대인을 만나 무기를 사용하고 적의 공격을 막는 법, 창이 부러졌을 때 검으로 싸우자고 요청하는 법 등을 배워 무용의 면에서 기사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고, 대인으로부터 기사 수여식을 받는다. 그런 뒤에는 대인의 조카딸을 만나 절망에 빠진 여인을 키스와 포옹으로 위로하는 법을 깨우치고 애인까지 얻으며, 어머니를 찾아 떠나면서는 “만일 하느님께서 저를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그분의 영혼을 위해 큰 보시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그리스도교적으로도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그가 아주 늦게 얻는 기사도적 태도가 있는데 바로 적절할 때 질문을 하는 지혜이다. 그는 그라알에 대해 묻지 않는데, 숲에서 만난 아가씨와 궁에 나타난 추녀에 의해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게 된다. 화자가 페르스발이 그라알에 대해 알고자 여정을 떠날 것임을 암시하고는 고뱅의 이야기로 시점을 전환하고 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끝나기 때문에, 페르스발이 그 지혜를 진정으로 얻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에서 이름 없이 등장한 기사 랜슬롯은 귀네비어를 구출하기 위해 사랑의 여정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창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하고, 바위 고갯길, 칼 다리, 그리고 여러 결투를 거치며 무용담을 쌓게 된다. 한 번은 어떤 기사가 칼 다리를 건너려는 랜슬롯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구경꾼들이 몰려나오기 전에 결투를 끝내지 못한 자신의 무기력함에 치욕스러움을 느낀 랜슬롯이 기사를 맹렬하게 몰아붙이자 기사가 자비를 간청하는데, 이때 나타난 한 아가씨가 랜슬롯에게 큰 고민을 안겨 준다. 기사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고 그를 죽여 버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가씨의 부탁을 들어주는 후덕과 기사의 목숨을 살려 주는 자비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자신이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는 재결투라는 묘안을 낸다. 이는 랜슬롯이 그 기사를 또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으로서 결국 랜슬롯은 기사의 목을 베고 아가씨에게 기사의 머리를 넘겨주며 자비심과 후덕을 전부 획득한 뒤 아가씨와 구경꾼들에게 용솟음치는 기쁨을 안겨 준다.
왕비 귀네비어를 구출하고부터는 다른 양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멜리아건트의 계략에 포로로 잡히지만, 마상창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관리인인 여인과 협상을 하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마상창시합에서는 왕비의 명을 받들어 졸전과 무공을 거듭하기도 하며, 여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스스로 돌아와 포로가 된다. 그의 이런 기사다운 면모는 멜리아건트의 여동생에 의해 빛을 보고, 결국 멜리아건트를 결투로 살해하면서 랜슬롯의 무용담은 마무리지어진다.
페르스발은 자신이 들은 조언을 어떤 생각 없이 충실하게 이행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언이 모든 상황에서 전부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적용과 부정적 피드백, 깨우침의 과정이 그를 성장시킨다. 그런 점에서 『그라알 이야기』의 페르스발 이야기는 주인공이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갈등하고 고민하며 성장하는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시원이라 할 만하다.
반면 랜슬롯은 이미 어느 정도 이상적인 기사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지혜와 무용이 함께 적절히 작동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갈등 상황을 겪으며 점점 더 이상향에 가까워진다. 그에게 사랑이란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며, 이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로 하여금 더 현명하고 진실되며 물리적으로도 뛰어난 기사가 되도록 이끌어 준다.
두 성장이야기의 공통점은 주인공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백지 상태의 페르스발은 뛰어난 무사의 모습을 자랑하지만 미숙한 기사로서 묘사된다. 랜슬롯은 오만하고 비열하지만 싸움 실력은 뛰어난 멜리아건트라는 대립항과의 갈등 속에서 진정한 기사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기사 문학은 이처럼 기사가 갖추어야 할 예모를 강조하는 교양서적과도 같았던 것이다.
2021년 서*대학교 '동서*전세미나' 기말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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