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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넷플릭스 영화 〈자기 앞의 생 〉 리뷰: 자기 앞의 사람 사랑하기
사랑해야 할까? 흔히 ‘사랑’은 성애적 사랑인 ‘에로스’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애착을 가진 물건에도, 매일 마주치는 풍경에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에게도 우리는 사랑을 준다. 하지만 빠른 템포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잦고 이른 이별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때로 두려우면서 대개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다. 사랑을 준 대상을 곧 상실하거나, 사랑이 나에게 도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다룰 때에는, 사랑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렇게, 회의감이 든다. 사랑해야 할까.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우리에게 ‘사랑하기’의 태도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던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출판했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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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기사가 자라는 방향에는 지혜가 있다
중세 기사 문학에서는 모험과 역경을 겪으며 성장하는 기사가 등장하곤 한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그라알 이야기』의 페르스발과 『죄수 마차를 탄 기사』의 랜슬롯이다. 특히 두 기사는 작품 속에서 이름 없이 여정을 시작하여 여러 가지 호칭으로 호명되다가 작품의 중간부터 이름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처음에는 ‘소년’으로 호명되던 페르스발은 이후 아서 왕에게 향하는 여정에서 ‘젊은이’라 호명되고, 대인에게서 기사 수여식을 받은 후로는 ‘신출내기 기사’를 거쳐 ‘기사’로 그 호칭이 바뀐다. 이후 그는 자신을 맞아준 아가씨로부터 ‘귀한 분’ 내지는 ‘아름다운 기사님’이라 불린다. 그런 다음 그는 길에서 만난 한 아가씨로부터 들은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페르스발 드 갈루아’라고 대답함으로써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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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구하기와 묘사하기: 경이로움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베오울프』는 전설적인 예이츠 영웅 베오울프가 그렌델, 그렌델의 어미, 그리고 불 뿜는 용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국들을 지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다른 로망에도 자주 등장하는 초월적인 인물인 녹색 기사는 『가윈 경과 녹색 기사』에서 가윈의 모험을 촉발시키고 마무리짓는 역할을 한다. 두 작품에서 주인공과 맞닥뜨린 이 경이적인 초월적 존재들은 영웅을 영웅답게 하고 영웅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작품의 핵심 중추이다. 그러나 두 작품의 경이적 존재들은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이 작업을 수행해나간다. 흐로드가르는 현명한 성군이지만 백성들을 12년 동안이나 괴롭혀 온 “지옥에서 풀려나온 악귀” 그렌델을 처리하지 못하고 골머리를 앓는다. 이 악귀 그렌델을 처리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베오울프다. 베오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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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과 느낌과 생각들
≪타인의 고통≫ 죽음, 전쟁, 사진, 그리고 전파
사진은 대상화한다. 수전 손택의 은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손택은 에세이 내내 사진이 피사체를 어떻게 대상화하는지, 사진가는 피사체를 어떻게 대상화하는지, 그것을 보는 관찰자는 피사체를 어떻게 대상화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러한 대상화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손택이 주목하는 것은 '죽음'과 '고통'이다. 손택에 따르면 사진은 죽음과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죽음의 주무대인 전쟁을 사진이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설명하느라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사진은 타인의 고통의 증거물이며, 요즘처럼 서로가 연결된 세상에서는 너무도 쉽게 전쟁과 고통을 세계화한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화된 고통은 사람들의 연민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연민은 오히려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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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식 사랑: 모순과 미완의 마주침이 완성하는 순환원
‘궁정식 사랑(amour courtois)’이라는 말은 가스통 파리스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죄수 마차를 탄 기사』에 관해 쓴 논문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그가 관찰한 궁정식 사랑의 전형적 특징은 네 가지다. 첫째, 부부 사이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혼외의 사랑을 그린다. 둘째, 귀부인이라는 상류층 여성은 남성 구애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고 때로는 구애자를 막대하거나 경멸하기도 한다. 셋째, 구애자는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엇이든 행하며, 여성의 부정적 피드백은 구애자의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넷째, 사랑에는 나름의 준칙이 있어 이것을 지켜야만 한다. 이들을 중세 문학 특유의 모순들과 연관짓는다면 중세 기사 로맨스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다. 파리스가 궁정식 사랑의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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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 속 인간
나를 이르고, 내 실존을 일으키는 '이름'의 의미
"오, 맙소사! 갈수록 태산이군요. 대체 당신 이름이 뭡니까?" 그는 자기 이름을 알지 못했으므로, 짐작으로 대답했습니다. 페르스발 드 갈루아라고. 그는 자기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지만, 알지 못한 채 사실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 그라알 이야기, 크레티앵 드 트루아, 최애리 옮김 중세 문학에서는 작품의 중반부까지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던 기사들이 누군가로부터 호명됨으로써 이름을 드러내고는 한다. 귀네비어 왕비로부터 호명되어 이름이 밝혀지는 영웅적인 기사 랜슬롯이나,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다가 대충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이름을 지어 말한 페르스발이 그러하다. 특히 페르스발은 이후에 정말로 '페르스발'이라고 불리게 됨으로써, '자기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지만 알지 못한 채 사실을 말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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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환대할 수 있다는 권력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에세이 『에로스의 종말』에서, 순수한 외부,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으로의 사랑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파국적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할 환대는 사랑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지만, 그의 논지는 환대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될 듯하다. 고대 서구 사회에서 이방인은 순수한 외부에서 온 완전한 타자이다. 손님의 신분을 증명해 줄 여권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계정도 없던 시절, 이방인을 맞이한다는 것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유지하고 있던 평화로운 균형을 깨뜨리는 재난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여행자로서의 입장이 더욱 혹독하다는 점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인간에게 친절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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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던져보자
≪위대한 유산≫ '비참한 심정'과 햄릿 사이 그 어딘가
에서는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인물들이 핍의 고향 이웃들로 왕왕 등장한다. 고향에서 연극을 하겠다며 설치고 다녔던 밥맛 이웃 웝슬 씨는 런던으로 떠나 연극 배우로서의 삶을 새로이 시작하는데, 그 결과가 좋지 못해 이웃들로부터—그리고 디킨스로부터— 조롱을 당한다. 핍은 허버트와 함께 31장에서 웝슬 씨의 연극을 보러 간다. 웝슬 씨는 햄릿 왕자 역을 맡았지만 관객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는다. 연극이 끝나고 핍과 허버트가 차마 박수를 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심한 동정심을 느낀 핍과 허버트는 웝슬 씨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급히 자리를 뜨려다 웝슬 씨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발각되고 웝슬 씨와 강제로 대면한다. '월든가버 씨'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던 웝슬 씨는 잔뜩 뻐기며 이렇게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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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승리호≫ 한국에서 다양성을 말하는 새로운 방법
본론부터 말하자면, 유치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스펙트럼을 제시하는 영화여서 좋았다. 가족적인 요소가 한국적 클리셰라는 평이 많던데, 적어도 나에게는 한국의 가족애 클리셰와는 다른 결로 다가왔다. 내가 한국 영화를 봐오면서 느낀 한국의 가족애 클리셰는 혈연관계 중심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속 가부장제화된 가족애나, 황정민/송강호/마동석 등 유명 남배우들을 핵심으로 둔 가족애적 동료애였다. 승리호의 가족애는 이러한 기존 한국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묘사된다. 인간 중에서 가장 어린 것으로 짐작되는 장 선장은 떡진 머리로도 스타일이 죽지 않는 성질 더러운 대장이다. 또한 감독은 누가 봐도 태호보다 타이거 박의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타이거 박이 아닌 태호에게 아버지의 정체성을 줬다. 대표적인 가족애 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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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던져보자
≪오뒷세이아≫ '이윽고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오뒷세이아』에서는 “이윽고 먹고 마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라는 구절이 여러 번 나온다. 주로 저녁 만찬을 가진 후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꼭 만찬 참석자들의 배가 불러야 본격적인 이야기나 전개가 시작되는 구조다. 하도 집착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어서, 읽다가 문득 궁금해져 그리스 원전을 찾아보았다. 원문은 “και του φαγιού και του πιοτού την όρεξι αφού σβήσαν,”이다. 그리스어-한국어 번역은 아무래도 상실되는 의미가 많을 듯해서 구글 번역기에서 그리스어-영어 번역을 돌려본 바로는 '음식과 음료에 대한 식욕이 사라졌을 때' 정도의 뉘앙스인 것 같다. 해당 구절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오뒷세이아』에서 11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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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해석 및 리뷰
목차 작년 초 영국 맨체스터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2인 1조 게임을 하는 자리에서 영국을 이루는 4개 국가를 전부 적어내는 문제를 푼 적이 있었다. 나는 스페인에서 온 친구와 같은 팀이었는데, 우리는 그만 웨일스와 북아일랜드를 헷갈려 ‘북웨일스(Northern Wales)’와 ‘아일랜드(Ireland)’라고 써내고 말았다. 영국으로부터 수십 년도 아니고 수백 년간 침략당하고 착취당했던 아일랜드의 역사를 고려했을 때 이 답안은 '일본의 섬들을 적으라'는 문제에 '독도'를 쓴 것보다 더 몰상식한 답안이다. 서양인들이 한국과 일본을 헷갈려할 때면 일본은 한국을 지배했던 국가이니 절대 헷갈려서는 안 된다고 성을 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기억이다. 그러나 유일한 동아시아인인 나와 몇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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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조식 전≫ 희곡으로 보는 가정주부의 말하기
2020.11.11 목차 현실에서 가정주부의 말하기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은 서로 다른 다양한 업무들을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해 잘 조직화된 하나의 업무 시스템이다. 가정주부들은 대화를 함으로써 업무 효율을 높이는 노하우와 ‘생활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문 지식을 공유하고,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여성의 말하기, 특히 가정주부의 말하기는 ‘수다’라는 호명 아래 사소하고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인 문학에서도 가정주부들의 대사는 사건에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단순히 포근한 집 안의 정경을 꾸미는 등 불필요한 역할을 맡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 가정주부의 말하기를 유의미하게 활용한 두 희곡이 있다. 수전 글라스펠의 과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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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턴 휴스의 자연: 나는 미국인인가 아프리카인인가
목차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시인 랭스턴 휴스,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흑인 시인, 흑인 지식인으로서 미국인이자 아프리카계 흑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융합하고자 애썼던 인물이다. W.E.B 뒤보아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자신의 '이중정체성(twoness)'으로 인해 두 개의 영혼, 두 개의 생각, 화해하지 못한 두 개의 분투를 겪게 된다. 시인들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흑인들의 시가 구체적인 인종적 경험을 다루어야 하는지 또는 다루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1920년대 초 첨예화되기도 했다. 이때 대부분의 흑인 시인들은 당시 커져가고 있던 흑인 지성인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종적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자아를 표현..